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문단 편집) == 그 외 ==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공주 일대를 허락없이 임의로 조사[* 당시의 일본인 관학자들도 발굴조사를 완전히 임의대로는 할 수 없었고 관련 부서에 서류를 제출한 뒤 최종적으로 총독부의 허가까지 받아야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가루베 지온의 행위는 불법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고적 및 유물 보존 규칙'을 공포함과 동시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켜 이들이 하는 공식적인 조사 이외에 시행되는 발굴은 전부 불법이라고 공포했기 때문. 조선총독부는 이 부분을 문제삼아 가루베 지온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하였던 [[가루베 지온]]은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공주고등보통학교]][* 현 [[공주고등학교]]]의 역사교사였다. 송산리 고분군 역시 [[가루베 지온]]이 조사하였는데 그는 1969년에 공주고보의 제자였던 이성철에게 국제우편으로 흑백사진 28장을 보냈다. 무슨 심산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28장 중에는 그가 도굴한 6호분의 현장 사진과 실측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철은 문화재청에서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이를 기증했는데 이상한 것은 1번부터 26번까지 매겨 놓은 사진 중에 10번 사진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정컨대 가장 중요한 무덤 내부의 유물 사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1번 사진에는 희미하게나마 유물로 보이는 물체가 보이고 관대 아래를 찍었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더구나 도굴된 다른 무덤에서는 극히 소량의 부장품이라도 수습된 것으로 보아 6호분에서 잔편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은 그가 도굴하고 증거가 안 남도록 깨끗이 치웠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가루베 지온은 1901년생으로 [[일본]] [[야마가타현]]에서 태어나 1925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공주로 가서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며 공주와 부여 지역의 백제 유적과 고분을 상술한 것처럼 조선총독부의 허가 없이 임의로 조사를 하고 도굴까지 일삼았다. 그리고는 1970년에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없다고 주장했다. 1959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문화재 반환위원들이 일본으로 직접 찾아갔으나, 여전히 없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1970년에 [[명지대학교]]에 강연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관했다. 가루베 지온은 이 유물들을 연구해서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라는 책을 저술했고 결국 그는 1970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족들도 끝까지 가져온 게 없다고 주장했고 2006년에서야 유족들이 백제 기와 4점을 돌려주는 데에 그쳤다. 참고로 원래는 봉분이 지금만큼 높지 않았었다. 의도적으로 도굴을 막기 위해 능선의 일부로 보이도록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처럼 변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